1987년 6월 민주항쟁
1980년대 중반에는 학생들과 야당 정치인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특히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대통령 직선제’는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처음에는 직선제로 바꾸라는 여론을 무시했지만,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어쩔 수 없이 헌법 개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87년 4월 13일에 갑자기 ‘호헌 선언’이 발표되었다. 호헌이란 헌법을 보호하거나 지킨다는 뜻이다. 즉, 이전의 헌법대로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뽑겠다는 선언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헌법을 개정할 시간이 부족하고, 정치인들이 서로 뜻을 모으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6월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뽑았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을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들어갔다. 그해 초에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 사건과 시위 도중에 최루탄을 맞아 숨진 이한열 사건으로 인해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곳곳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된 시위는 20일간 매일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차츰 일반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 국민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회사원들도 점심 시간이나 업무를 마친 뒤 넥타이를 맨 채 시위에 참여해 ‘넥타이 부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해 대통령 직접 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속되거나 연금된 정치 인사들의 석방 등을 내용으로 하는 6 · 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헌법이 개정되었고, 국민들은 16년 만에 대통령을 자신의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및 이한열 사건
전두환 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 9일, 1천 여 명의 연세대 학생들이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을 하루 앞두고 이 대회에 출정하기 위한 연세인결의대회를 마친 뒤,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해 7월 5일 뇌손상으로 인한 심폐기능 정지로 사망하였다.
1986년과 1987년은 학계·문화계·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었던 때로, 1987년 5월 18일 박종철(朴鍾哲)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직후에 발생한 일이어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후 5일이 지난 7월 9일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학생·시민·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총 7만여 명이 참석하였고, 시신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묻혔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전두환정권은 국민들에게 더욱 깊은 불신감을 주었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어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이는 등 이른바 6월항쟁이 정점에 이르게 되자, 전두환 정권은 시국 수습을 위해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로 하여금 대통령 선거의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6·29선언이다.
1987년 숨진 이한열과 박종철은 14년 만인 2001년에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되어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하였다.
'정보 > 기념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년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0) | 2023.06.02 |
---|---|
매년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공무원 근로자의 날 휴무 여부 (0) | 2023.04.30 |
매년 4월 21일은 과학의 날 (0) | 2023.04.21 |
매년 4월 12일은 도서관의 날입니다 (0) | 2023.04.12 |
4월 9일 기독교 축일 부활절에 대하여 (0) | 2023.04.10 |